작가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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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진 시인 박정만작가의 고향 2022. 8. 24. 04:09
시인 박정만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돼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해서는 앞서 '카프(KARF)를 이끌던 시인 임화'에서 언급한 바 있다. 옮겨 쓰면 다음과 같다. 박정만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고문 후유증과 당시 겪은 충격을 술로 달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나는 사라진다 /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를 썼다.(이것이 전부인 단 2행뿐인 짧은 시이다) '한수산 필화사건'은 1981년 5월 중앙일보 연재 중이던 소설 '욕망의 거리'의 내용이 문제 돼 작가 한수산을 비롯해 중앙일보 권영빈 편집위원, 도서출판 고려원 편집부장 겸 시인 박정만 등 6명이 보안사로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한수산은 혹독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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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KARF)를 이끌던 시인 임화작가의 고향 2022. 8. 14. 06:31
예전 학교 다닐 때 과거의 시인들을 거론하다 보면 꼭 튀어나오는 '카프'(KARF)라는 단어가 있었다. '카프'는 1928년 결성된 조선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영문 이니셜로, 요즘 말로 하자면 좌빨 문학인 단체명이다. 그래서 '카프'는 대한민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꼭 따라다니는 문학집단이었지만 그저 앞과 같이 단어의 해석으로 만족해야지 더 이상 깊게 들어가면 골치 아픈 일이 따를 수도 있었다. 붙잡혀 갔다 풀려나면 다행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박정만 시인 같은 경우이다. 박정만은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고문 후유증과 당시 겪은 충격을 술로 달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를 썼다. 제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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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으로 전한 여류시인 이옥봉의 러브레터작가의 고향 2022. 7. 23. 23:58
최근 TV에서 방영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다시 보았다. 원래 볼 의도가 아니었고, 또 중간쯤부터 시청한 까닭에 끝까지 볼 것 같지 않았는데, 이야기의 힘에 끌려 나카야마 미호가 보내는 러브레터를 끝까지 읽게 됐다. 역시 이 러브 스토리의 압권은 라스트 신이다. 조선시대에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못지않은 연서(戀書)가 있었다. 사모의 심정과 애절한 구애(求愛)를 담은 미사여구 늘어지는, 그래서 자칫 구질구질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연서가 아니라 애뜻하면서도 임팩트 강한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몽혼'(夢魂, 꿈속의 넋)이란 제목을 가진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요즘의 안부를 묻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달빛 내려앉은 창가에 그리움만 가득 합니다 만일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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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의 시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작가의 고향 2022. 7. 13. 22:30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위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시인 김상용의 1939년 작으로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래서 전원(田園) 속의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지향하는 삶, 너그럽게 자연을 즐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고픈 마음( 해설) 등을 주제로 공부해야 했고, 특히 마지막 문장 ‘왜 사냐건/ 웃지요'에서는 격이 높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경지(시인 나태주의 해설)를 공감해야만 했다. 나태주는 더 나아가, 위 시를 우리나라 전원서정을 올곧게 다듬은 시로 평가하며 김소월의 서정 시와, 이육사의 「청포도」, 청록파의 세 시인 및 신석정, 장만영, 김동명, 박용래 같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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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람 박인범의 명시(名詩)작가의 고향 2022. 7. 7. 00:25
통일신라까지를 포함하면 신라시대는 무려 1천 년이거늘 의외로 전해오는 당대의 한시(漢詩)가 적다.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의 작품 「황조가(黃鳥歌)」가 전하는 것이 차라리 신기하기까지 하다. 김부식이 그 오래된 한시를 어떻게 채록했는지 궁금하다. 신라시대의 시는 여류시인 설요(薛瑤)의 것을 비롯해 몇 편이 전하나, 통일신라 때는 주옥같은 당시(唐詩)가 쏟아지던 무렵임에도 전해져 오는 시가 드물고, 말기에 지어진 최치원·최광유·최승우·박인범(朴仁範)의 시가 전할 뿐이다. 이들은 당나라에 유학한 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무원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관료생활을 하며 당대의 시 문화를 흠향했을 법하니, 그들의 작품이 전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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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의 나그네는 어디를 걸었을까?작가의 고향 2022. 6. 26. 13:12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ㅡ 박목월의 「나그네」 ㅡ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박목월이 지은 '나그네'라는 시를 모를 수 없다. 국정교과서든 검인정교과서든 이 시는 어느 국어책이든 실렸고, 시험문제로도 단골로 출제되었으며, 시 자체도 짧고 응축성이 있어 낭송을 하면 착착 감기는 맛이 있는 까닭에 즐겨 애송되었다. 그리고 이 시에 대해서는 여러 문학평론가가 이러저러한 해설을 달아 유명세에 힘을 보탰다. 그중 서울대 교수이자 저명 문학평론가였던 권영민은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고독한 운명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러한 나그네의 고독감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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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장진주사작가의 고향 2022. 6. 12. 14:47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 세어가며 끊임없이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고 가든 아름답게 꾸민 상여 뒤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든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숲 무덤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까? 하물며 원숭이가 무덤 위에서 휘파람 불 때 뉘우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국어교과서에 유명한 가사 '관동별곡'이 실린 관계로, 그리고 이 가사문학은 어느 시험이건 빈출도가 높았던 관계로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 외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도 적어도 제목만큼은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작품이다. 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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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동의 노천명과 건축학개론작가의 고향 2022. 5. 5. 23:53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冠)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위의 시 노천명의 '사슴'은 과거 교과서에 실렸던 까닭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잘 쓴 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으나 노천명이라는 신여성의 이름값 때문인지 국어교과서에 오랫동안 올라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은 없어졌을 것이다. 앞서 부천 상동 시가(詩街)에 있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시비가 2019년 철거되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 '조지훈의 석문') 그곳에 있던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가 새겨진 시비도 그즈음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을 내건 노천명 문학상도 지금은 없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