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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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관사의 숨은 독립운동가 백초월 선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21. 22:25
북한산 진관사는 고려 초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유폐되었던 절이다. 왕손을 유폐시킨 자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고려 7대 왕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였다. 그녀는 어린 목종을 대신해 12년간 섭정하면서 여황제로서의 절대 권력을 구가했는데, 다음 왕으로는 외척 김치양과 간통해 낳은 아들을 세워 권력을 이어가려 하였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방해가 될 법한 왕순을 핍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으니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을 시해하고 기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이후 강조는 신혈사(神穴寺, 진관사)의 왕순을 데려와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곧 8대 왕 헌종이다. 헌종은 유폐 시절 자신을 극진히 돌보았던 신혈사 진관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대사(大師)로 삼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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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현장 서대문 천연정과 청수장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20. 20:20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은 영조 17년(1741)에 세워진 천연정(天然亭)에서 유래되었다. 천연정은 조선 태종 때 만들어진 서지(西池) 곁에 세워졌으며,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맑은 물에서 연꽃이 피어나니 천연스러워 꾸밈이 없도다(淸水出芙蓉, 天然去雕飾)」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빌렸다고 한다. 서지에는 시구처럼 연꽃이 가득했으나(아래 사진) 일제시대에 메워져 죽첨(다케조에) 공립보통학교*가 되었고 지금은 금화초등학교가 위치한다. * 다케조에(竹添進一郞)는 구한말의 일본공사 이름이다. 서지는 태종 7년(1407) 돈의문 서북쪽에 중국 사신을 맞기 위한 누각 모화루(慕華褸)를 세울 때 만들어진 연못으로 흥인지문 밖의 동지(東池), 숭례문 밖의 남지(南池)와 같은 풍수 차원의 연못이었다. 서지는 동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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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의 순교와 계동 석정보름우물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18. 18:15
앞의 글 '김대건 신부가 그린 조선지도 Carte de la Corée'에서는 지도에만 촛점을 맞추는 바람에 그의 순교의 거룩성이 간과된 감이 있다. 어찌됐든 그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회유되었다면 오늘날의 김대건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에는 103인 성인의 하나로 선포되었으며, 2019년 유네스코 제40차 총회에서는 김대건을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 · 이벽· 황사영의 시복(諡福)은 불편하다. (이들은 2021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 의해 복권하여 시성됐다) 이들은 이 땅에 가톨릭을 심은 자들로서 신앙의 문제로 죽기는 하였으되, 순교했는지는 알 수 없는 자들이다. 이승훈은 조선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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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 갑신정변의 현장과 외로운 석탑 하나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16. 22:50
서울 계동의 이름은 조선초 빈민 구휼 병원 제생원(濟生院)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처음에는 제생동이었으나 순조년간 계생동(桂生洞)으로 변했고,(1834년 전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때(1914년) 기생들이 사는 기생동(妓生洞)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하여 '생'자가 떨어져 나가 현재의 계동(桂洞)이 되었다. 계동은 과거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북촌문화센터, 한학수 가옥, 백홍범 가옥 등의 옛집과 동양화가 배렴, 서양화가 고희동의 집 등이 미술관의 형식으로 개방되어 내·외국인 북촌 순례객의 순례 코스로서 주말마다 붐빈다. 다만 이곳 계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하나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잊히고 있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이다. 앞서 '김옥균과 홍종우(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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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역참, 혹은 말죽거리라 불리던 곳에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13. 22:06
지하철 양재역에서 출구를 잘못 찾은 까닭에 아래의 양재역 표석을 보게 되었다. 「양재역 터」의 제목 아래 「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 터」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양재역에서 옛 양재역 터 표석을 만나고 보니 옛 양재역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그리고 표석의 제목은 양재역 터보다는 양재역참 터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역(驛)은 고구려·신라 때의 기록도 보이나 ('압록강 이북은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인데 그 하나는 국내성으로서 평양에서 17개의 역을 지나 여기에 이른다' /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 아무래도 일제시대의 산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니 조선시대에는 역보다는 역참으로 불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3권에 나오는 '정역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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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내시 무덤을 지나며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12. 23:57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좋아하는 라는 소설은 황건적의 난으로 피폐해진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다. 또 그 소설의 대부분은 유비가 낙양의 상선으로부터 구입한 귀한 차(茶)를 황건적에게 빼앗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부분이라 함은 에 여러 버전이 있음을 말함인데, 아울러 대부분 그 피폐의 원인을 십상시(十常侍)의 발호로부터 찾는다. 십상시는 후한 영제(靈帝, 156~189년) 때에 정권을 쥐고 조정을 농락한 10여 명의 환관들을 말한다. 앞서 십상시를 포함한 중국의 역대 유명 환관들을 '역사의 유명한 환관들 I / II'에서 다룬 바도 있지만, 이들 환관의 위세는 때로는 황제를 능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환관이 이렇듯 위세를 누린 적이 없으니, 애써 꼽더라도 명종조 성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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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기슭에 남은 계유정난의 흔적들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2. 12. 00:33
1453년의 이른바 계유정난은 전통적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규범에도 일시 변화를 주었다. 계유정난은 그만큼 큰 사건이었으니 상것이 양반으로 올라서고 양반이 상것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는 10월 10일 계유정난의 그날 밤 김종서 대감을 철퇴로 내리친 수양대군의 노복 임어을운(임운)은 면천되었음은 물론 대감 행사를 하며 계유정난 때 죽은 영의정 황보인의 집을 하사받아 살았다. 반면 정경대감댁 마님이었던 김종서의 부인과 여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분변화는 왕족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세종대왕의 아홉째 왕자이자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었던 화의군 이영(李瓔)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비협조적이었으며 훗날 금성대군(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로 가산 적몰 후 전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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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그날의 김종서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1. 26. 21:02
* '세종대왕의 특명-백두산 북쪽의 공험진 비를 찾아라'에서 이어짐. 앞서 말한 대로 김종서는 세종대왕이 말한 공험진 비를 찾지 못했지만 두만강 주변과 그 너머의 강역을 개척하고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 부령(富寧), 회령(會寧), 종성(鍾城)의 6진을 설치해 조선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세종은 개척된 지역에 사민정책을 취해 각 도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다. 그런데 그곳이 워낙 오지이고 험지이다 보니 국경선을 후퇴시키자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세종은 단호했다. "안팎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서로 뜬 말에 움직이나, 나는 큰 계책을 굳게 지켜서 잡된 말에 의혹하지 아니하고, 북문의 일을 오로지 경(김종서)에게 위임하여 그 다스림을 맡기노라." ( 77권, 세종 19년 5월 20일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