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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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장 독일조계지와 파울 바우만 저택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9. 22:44
오래전 양꼬치 집에서 우연히 마시게 된 칭다오 맥주에 감탄했던 기억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중국 맥주의 기대 밖의 맛에 놀라 그 연유를 살펴보았던 것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니, 제국주의 독일이 1898년 중국 산동반도 교주만(膠州灣) 일대의 땅 552㎢를 조차(租借)한 결과이다. 청나라가 비실비실할 때의 이야기다. '조차'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양측의 조약에 의해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일정 기간 빌려서 통치함'으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교주만 일대를 빌렸다기보다는 빼앗았다 봄이 옳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의외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독일은 1897년 11월에 일어난 독일인 선교사 피살사건을 핑계로 자국의 군대를 파견해 교주만에 주둔시키고, 이듬해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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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애관극장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6. 20:1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는 듯하다. 극장이란 극(劇)이 행해지던 곳을 말함이니 고대의 원형극장이 원류이겠으나 그곳에서 반드시 극이 행해졌다는 보장이 없는 까닭에 '가장 오래된 극장'을 비정하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고대 3대 비극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 BC 525/524~456/455)의 활동 시기가 기원전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이 초연되었다고 전하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극장은 무려 2500년 전의 것이 되니 인간의 공연활동은 그 뿌리가 무척이나 깊다 하겠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의 모든 도시에 극장 암피테아테르(Amphitheater)를 건립했다. 여기서 암피(Amphi)는 '사방팔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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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송학동 홍예문과 그 길에 있던 건물들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10. 2. 20:53
1876년 조선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부산과 원산항이 개항되었다. 그 조약문에 명시된「부산 외 2개 항구를 더 개방하고 일본인의 통상과 왕래를 허용한다」는 내용에 의거해서였다. 일본은 이때 부산 외에 두 항구로서 원산과 제물포를 강력히 희망했다. 원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함이요, 제물포는 수도 한양을 옥죄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에 따라 1880년 원산이 개항되었다. 하지만 인천은 1882년까지 개항되지 않고 있었다. 조선측이 개항하지 않는 이유는 인천항이 서울과 매우 가깝다는 이유였는데, 이것은 일본측이 인천을 개항장으로 요구하는 이유와 같았다. 조선에서는 같은 이유로써 인천 대신 남양(南陽)의 마산포(麻山浦)를 개항장으로 제시했고, 일본도 조선측의 완강함에 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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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다리와 애탕신사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20. 21:27
인천 월미도는 지금은 승용차와 버스로, 혹은 도보로 아무 거리낌 없이 다닐 수 있어 이곳이 과거 섬이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월미도가 뭍과 연결된 해는 1922년으로 100년이 넘었고, 처음에 만들어졌던 약 1㎞, 2차선 규모의 둑길은 지금은 그 주변이 간척되어 넓은 육지가 되었으니 사실 이제는 섬이라고도 할 수 없다. 아래 사진과 지도를 보면 월미도 둑길의 어제와 오늘이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본래의 월미도는 1882년 개항 전까지는 썰물 때면 모래톱을 걸어 뭍으로의 왕래가 가능한 곳이었다. 그러다 제물포가 개항장이 되면서 선박 입출항을 위한 준설을 했고 이에 바다가 깊어져 더 이상의 왕래가 불가능해졌는데, 그 무렵인 1904년 일제가 이곳에 다리를 놓았다. 일본이 이 목교를 서둘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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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사관이 들어설 뻔했던 인천자유공원 아래의 명당 자리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8. 23:58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말했거니와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에 있어서 깜깜이 조선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청나라와 미국이 함께 작성한 수교조약문에 사인을 한 것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미수교조약문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버트 슈펠트가 인천이 아니라 톈진(天津)에서 이미 작성을 한 것이었고, 슈펠트가 인천으로 건너와 조선의 대표(신헌·김홍집·서상우)를 불러내 조약문에 사인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왜 조선과 미국의 수교조약문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이홍장과 슈펠트가 톈진에서 작성했을까? 우리는 그동안 그 당시 청나라가 조선이 속방임을 주장했기에 대국의 자격으로 회담에 나섰다고만 알고 있었다.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半)만 가르친 것이고, 그래서 반만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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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똥값에 팔아넘긴 노다지 운산금광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3. 00:25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1889년 주미 대리공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이하영이 기차 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철도에 대해 설명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왔다. 이에 고종이 철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때부터 철도 도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의 학설은 2019년 2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2등 서기관이었던 월남(月南) 이상재의 이라는 문서가 발견되며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상재는 이 문서에 1888년 탈능돈(달링턴)이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내기 위해 조선정부에 제시한 내용을 보고서 형식으로 자세히 수록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달링턴이 제시한 계약서 초안인 '철도약장(鐵道約章)'이 함께 수록돼 있는데, 결과적으로 달링턴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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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수돗물을 공급했던 송현배수지 제수변실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2. 00:12
앞서 기원전 18년 멀리 부여에서 내려와 미추홀(고 인천)에 정도(定都)하려고 했던 비류 왕자의 이야기를 실었다. 에 따르면 비류는 인천 정착에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땅에 습기가 많고 물이 매우 짜서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인천 미추홀구와 연수구 사이에 있는 해발 217m의 문학산은 비류가 정착을 시도했던 곳이라 전해지나 고고학적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또 개연성도 희박하다. 그 개연성을 찾자면 오히려 동구 송현동 소재 해발 56.8m의 송림산이 유력하다. 이 낮은 산은 구한말 수돗물 공급시설인 배수지가 설치되어 흔히 수도국산이라 불리기도 하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체 181,500㎡ 규모로 적지 않다. 그래서 고대도시의 수도로써 어울릴 듯하지만, 이 일대는 우물을 파도 짠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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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동상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3. 9. 11. 00:17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29일 서울이 무력하게 함락되었다. 남침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탓이니, "전쟁이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겠다"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일찌감치 도망가 대전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마 저녁은 대구나 부산에서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참으로 문제적 인간이었으니, 북한의 김일성이 완벽한 남침 준비를 갖추는 동안 전쟁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위와 같은 큰소리만을 쳐냈는데, 3.8선이 뚫렸을 때는 더 가관이었다. 영국에서 공부했던 그는 일요일에는 전화를 안 받는 고급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알다시피 남침은 일요일 새벽부터 시작되었음에도 국방부 장관은 아침부터 내내 연락 두절이었으니 그 부하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탔을까? 뒤늦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