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페르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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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최후(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9. 23:59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에서 이어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처음 만난 곳은 터키 남부 도시 타르수스로, 훗날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로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곳이다. 앞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곳 소아시아 지방은 기원전 42년 제 2차 삼두정치의 결과로 안토니우스에게 할양된 땅이었다. 그는 그 이듬해 이곳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 면세 혜택을 베풀었는데, 이에 관한 조칙을 직접 발표하러 왔다가 내친김에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하였다. 그녀가 그전 로마의 내전 당시 자신의 반대파인 퀸투스 캇시우스를 지원한 데 대한 문책을 하자는 것이었다.(공화파와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안토니우스는 캇시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와 싸웠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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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70인역 성서'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8. 08:10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티레를 정복한 후 이집트에 무혈입성한 일은 앞서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에서 설명한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나일 삼각주 서쪽에 위치한 라코티스라는 작은 마을 없애고 알렉산드리아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이후 이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정주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 의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도읍이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수로서 종군한 그는 기원전 330년 박트리아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죽인 벳수스 총독을 붙잡아 처형시키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정벌에 앞장 서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며,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정주해 자신의 나라를 건립하였다.(BC 305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재위 BC 305- 285)의 두상 그는 다른 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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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미인이었나?(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6. 23:59
지난 2008년 12월 16일 영국 유수의 신문인 데일리메일(Dailymail)은 클레오파트라의 실제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3d 제작의 아래 얼굴을 실었다. 이집트의 여러 자료를 조사해 1년 이상 걸려 완성했다는 얼굴이다. 이후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 사진에 실소(失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미추(美醜)를 떠나 내 상식으로는 전혀 나올 수 없는 얼굴이 버젓히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힙합을 즐기는 혼혈 소녀 같은 이미지의 사진 이 사진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 얼굴이 혼혈 또는 아랍인의 형상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지 모르겠으나, 앞서 말한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서는 절대 이러한 얼굴이 절대 나올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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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의 후예들/훈족의 왕 아틸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1. 07:48
* '기마민족의 후예들/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에 이어짐. 훈족의 로마 공격이 재개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통합적인 힘이 아니었던 바, 국지적인 약탈이 지속되었을 뿐 그것이 로마제국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 전투력은 여전히 위력적이어서 그 개별적인 부족의 공격에도 로마와 게르만족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활은 여전히 강해 삼각의 쇠 화살촉은 로마군의 가죽갑옷을 가볍게 꿰똟어 박혔고, 그간 이곳의 말들과 혼혈하며 개량된 저들의 조랑말은 더욱 힘차게 달렸다. 그런데 그즈음, 로마로서는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훗날 이 분열된 훈족을 통일시켜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아틸라가 탄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다행스럽다'는 표현은 그가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한 극악무도한 침입자가 아니었다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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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의 후예들(II)/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0. 05:25
흉노족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유럽인은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초원에 살던 유목민 알라니족이었다. 그들은 그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동양의 흉노족과 처음으로 조우한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기록에 남게 되었다. 374년, 발라미르를 대장으로 하는 흉노족의 일파는 볼가 강을 건너 자신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마을로 향해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흉노족이 첫 상대로 맞은 이 알라니족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던 바, 그들 역시 카프카즈령 로마제국과 파르티아를 상대로 노략질을 해 먹고 살던, 나름대로 분탕질과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나운 민족이었다.(파르티아에 대해서는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 참조) 볼가 강의 위치와 흉노족의 침공(←) 이에 볼가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땅은 100년 간 흉노족의 영토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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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의 후예들 (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8. 07:47
부순희라는 여자 사격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불세출의 총잡이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바, 94년 세계선수권, 97년 밀라노 월드컵, 98년 뮌헨 월드컵, 99년 월드컵 파이널스 등에서 우승하며 10년 이상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아무튼 스포츠 권총과 공기 권총에서는 세계에서 그녀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부진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2000년 무렵 위암 판정을 받았고 2002년 4월에 수술을 했다. 가족들 중에서도 위암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니 필시 가족력에서 기인한 병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술 후 재기에 성공하였으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6년 만에 다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가히 인간승리로 불릴만한 드라마적인 인생 스토리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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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5. 07:39
절경으로 이름 높은 괴산 화양동(華陽洞) 계곡에 들어서면 우선 만나보게 되는 것이 경천벽(擎天壁)과 운영담(雲影潭)이라 불리는 아래와 같은 기암괴석이다. 그리고 그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조선 중기 유학자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인근의 만동묘(萬東廟)를 마주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그의 손자이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배향한 사당이다. 그들의 사당이 왜 이곳 화양동 산자수명한 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화양서원의 배향자인 송시열로부터 찾을 수 있다. 만동묘는 그의 유훈으로 세워진 것이고, 이 화양 9곡 절경들의 이름은 그가 중국 송나라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흉내 내 지은 것으로, 한 마디로 지독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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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성궤의 진실을 찾아서성서와 UFO 2018. 1. 23. 07:13
신학대학의 커리큘럼 중에 ‘성막론(聖幕論)’이란 과목이 있다. 출애급 당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여호와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석판(石板)을 보관한 곳이 성궤(聖櫃)이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 성스러운 궤짝을 막을 둘러 보호한 곳이 곧 성막인데, 그것이 성스럽다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이론을 공부하는 과목이다.(모세가 호렙 산, 즉 시나이 산에서 여호와를 만날 당시의 상황과, 이후 히브리인의 영도자가 되어 히브리인의 이집트 탈출, 즉 출애급을 이끄는 상황은 앞선 챕터인 '호렙 산의 UFO/모세를 속인 여호와의 절묘한 트릭'과 '엑소더스 당시의 UFO/여호와는 정말 바다를 갈랐을까?'에서 자세한 설명을 마친 바, 여기서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출애급 당시의 성막 상상도 성막의 구조 성막 안에..